우리 산하 344

문수지맥 트레킹

9월의 시작은 서늘한 가을바람과 함께 문수지맥 일부구간인 봉화 문수산자연휴양림에서 가부재 경유 천주교우곡성지까지 약12Km를 트레킹했다. ※문수지맥이란? 백두대간 옥돌봉 서남쪽 280m지점에서 분기하여 서남진하여 낙동강 본류와 내성천을 가르며, 문수산(1207.6m),갈방산(712m),만리산(791.6m),용두산(665m),복두산(509m),요성산(490m),박달산(580m),봉수산(569.6m),천등산(575.4m),조운산(635m),학가산(874m),보문산(641.7m),대봉산(210m),검무산(331.6m),마부산(330m)을 일구고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 낙동강 본류에 합수되는,삼강나루터 앞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114.5km 정도되는 산줄기이다.

봉화 우곡성지를 찾다

■우곡성지 봉화에 위치한 우곡성지는 한국 최초의 수덕자로서 '칠극'의 가르침을 따라 천주교 수계 생활을 28년 동안 이어 온 농은 홍유한(1726~1785년) 선생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 칠극(七克) 1. 복오(伏傲) - 교만을 억누르다. 2. 평투(平妬) - 질투를 가라앉히다. 3. ​해탐(解貪) - 탐욕을 풀다 4. 식분(熄忿) - 분노를 없애다 5.​ 색도(塞饕) - 탐을 내어 먹고 마시는 것을 막아내다 6. 방음(防淫) - 음란함을 막아내다. 7. ​책태(策怠) - 게으름을 채찍질하다.

우리 산하 2022.09.02

아침 숲길을 걷다

아침 숲길을 걷다보면 새벽 안개가 걷힌다. 내 마음의 근심도 걷힌다. 풀잎에 맺힌 이슬이 사라진다. 내 마음에 미움도 사라진다. 나뭇가지에 바람이 지나간다. 내 마음의 헛된 집착이 지나간다. 풀벌레, 산새, 바람소리가 들린다. 내 몸에는 잘 정화된 에너지가 채워진다. 아침 숲길을 걸으면서 아낌없이 비우고 또 비우면 비운안큼 채워지고 또 채워진다. -흥림산자연휴양림 아침숲길을 걸으며-

영양 선바위

선바위는 경상북도 영양군에 자양산의 끝인 자금병과 함께 석문이라 하였으며 옛부터 입암, 신선바위, 선바우 라고도 하였다. 선바위와 남이포에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운룡지의 지룡의 아들인 아룡과 자룡 형제가 있었는데 역모를 꾀하여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남이장군에게 토벌할 것을 명하니 남이장군이 이곳까지 내려와 아룡 자룡을 물리치고 도적의 무리가 다시 일어날 것 같아서 큰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렸다 하는데 그 마지막 흔적이 선바위라 한다. 절벽과 강을 사이에 두고 바위를 깎아 세운 듯하나 언듯 보기에는 거대한 촛대를 세워 놓은 것 같은 바위가 선바위이고, 석벽과 절벽을 끼고 흐르는 두 물줄기가 합류하여 큰 강을 이루는 강을 남이포라 부른다.

우리 산하 2022.08.31

영양 서석지

https://youtube.com/shorts/1Kh3dDoUsUI?feature=share 1640년경에 정영방(鄭榮邦:1577~1650)이 축조하였다고 한다. 정영방은 1605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나라가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병자호란 후에 넷째아들인 제(悌)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먼저 서쪽 구릉 아래에 연못을 파서 서석지라 이름하고 양 옆에 정자를 세웠는데 오른쪽을 주일재(主一齋), 왼쪽을 경정(敬亭)이라 불렀다. 서석지라는 명칭은 이 연못 속에 있는 암반(岩盤)인 서석군(瑞石群)에서 유래한다. 이 정자는 자손들이 수차 중수하였으나 사방 부연과 돌려친 난간 등이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산하 2022.08.31

안동 월영교

한 부부의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이 간직되어 있는 나무다리이다. 먼저 간 남편을 위해 머리카락을 뽑아 한 켤레의 미투리를 지은 지어미의 애절하고 숭고한 사랑을 기념하고자 미투리 모양을 담아 다리를 지었다고 한다. 2003년 개통되었으며 길이 387m, 너비 3.6m로 국내에서는 가장 긴 목책 인도교이다. 다리 한가운데에는 월영정(月映亭)이 있다. https://youtu.be/PSjd-Ysblxo

우리 산하 2022.08.30

도산서원

이황(李滉)이 별세한 지 4년 뒤인 1574년(선조 7)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의 뒤편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韓石峰)이 쓴 ‘陶山(도산)’이라는 편액(扁額)을 받았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는 동시에 영남유림의 정신적 중추 구실을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 없어지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우리 산하 2022.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