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자료

윤구병선생님의 스스로 살아남기

Green Guardian 2008. 1. 11. 20:52
 

 우리 아이들은 사람의 자식이 아닌 자연의 자식입니다


 우리가 돌보고자 하는 아이들, 우리가 돌보아야 하고, 돌볼 수밖에 없는 아이들은, 사실은 원초적 생명의 시간에 가장 가까이 있는 아이들, 아직 상처받지 않고 온전한 상태에 가까운 우리 미래의 생명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인간의 시간 속에서 사람의 자식으로 자라기에 앞서 생명의 시간 속에서 자라야 할 자연의 자식들입니다.


아시다시피 사람을 뺀 다른 생명체들은 태어난 뒤로 여러 해에 걸쳐서 따로 무엇인가를 배워 익히지 않더라도 거의 모두 제 앞가림을 합니다. 거미와 벌은 부모나 어른들에게서 따로 집 짓는 기술을 배우지 않는데도 뛰어난 건축 기술을 타고납니다. 병아리는 따로 엄마나 아빠닭이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 스스로 단박에 가려 냅니다. 조상들의 삶의 시간은 몸에 아로새겨진 기억으로, 유전 정보의 형태로, 본능의 형태로 후손들에게 몸에서 몸으로 물려주고 물려받습니다. 따로 교육받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사람 몸에서 태어난 새 생명체는 본능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언제부터', '왜' 사람이 타고난 유전 정보에 기대서 살아남을 수 없는 생명체로 바뀌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생존 여건이 바뀌어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 되면 생명체들이 세우는 생존 전략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환경이 너무 빨리 바뀌어 재적응할 시간이 없을 때 개체나 종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맨 처음 이 지구 위에 생명체가 나타난 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개체와 종이 누려 온 생명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과 떼어 놓을 수 없게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흘러왔습니다. 생존을 위협하는 장애를 극복하려 생명의 기능이 끊임없이 분화하고 재조직되어 다양한 구조를 지닌 생명체들이 시간 속에서 명멸해 왔습니다. 그런 뜻에서 '진화'는, 삶의 기능이 장애물을 만나 나뉘면서 저마다 다른 기억을 지닌 그 기능들이 저마다 다른 생체 구조를 지니고 다양성을 키우면서 생성하고 소멸하는 과정, 곧 역동적인 생명의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봅니다.


인류가 이 지구 위에 나타나면서, 그리고 생체로 구조화된 신체적 기억만으로는, 그러니까 본능으로 불리는 유전 정보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생존의 한계 상황에 맞닥뜨리면서 '생명의 시간'은, 인간을 기준 삼아 볼 때, 크게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으로 나뉩니다. 아무 의식 없이 '자연의 시간'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는 살아남을 길이 막힌 생명체인 인류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억 바깥에 따로 삶에 필요한 정보를 후천적으로 머리 속에 새기고 스스로 그 후천적인 기억을 이용하여 살 길을 찾을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그 정보를 가르치고 익히게 해서 살아남게 만드는 틈을 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시간'이고, 이 '인간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때에 따라 '교육'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때에 따라 '문화'나 '문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시간'은 인류가 변화된 환경에서 이 지구 위에 뿌리내리고 살기 위해 마련한 어쩔 수 없는 괴리이자 간극이고, 사람의 삶을 다른 생명체들의 삶과 구별 짓는 저주의 시간이자 축복의 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는 거듭나는 삶의 표현입니다


모든 개별 생명체의 삶은 한시적입니다. 몇 시간 만에 죽는 것도 있고 천 년이 넘게 살아남는 것은 있지만 언젠가는 목숨이 끊어집니다. 이것을 모르는 생명체는 없습니다. 하잘것없는 미생물에서부터 고등 생물에 이르기까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머리로 아느냐, 몸으로 아느냐, 의식하느냐, 못 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생명 그 자체, 절대화한 삶에는 죽음이 그림자로 따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생명' 그 자체이므로 죽을 수 없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온생명'(이 개념은 장회익 교수가 개별생명체나 종을 다 포괄하는 범우주적 생명이라는 뜻으로 써온 것입니다.)인 하느님에서 분리된 개별 생명체로서, 그것도 남성과 여성으로 양성이 구분된 고등 생명체로서 삶과 죽음이 씨줄과 날줄을 이루는 시공 연속체인 현실 공간 지구에 발을 디디는 순간 처음으로 이 두 사람은 성에 눈이 뜹니다. 소꿉동무에서 짝짓기 대상으로 상대방을 의식합니다.


아이가 생겨납니다. 아이는 거듭나는 삶의 표현입니다.

죽음으로 귀결되는 시간의 압력을 이겨 내는 새로운 삶이고 죽음의 극복이자 극복된 죽음입니다. 죽음에 맞선 삶의 선물(이런 뜻에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불러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겁니다.)이지요. 삶에는 기억도 없고, 지혜가 깃들지도 않는다는 것은 이미 밝혔습니다. 따라서 갓 태어난 새 생명인 아이가 머리에 아무런 기억도 없는 무지몽매한 철부지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새 삶을 찾아 사랑으로 맺어진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는 새 생명이자 사랑이요, 살아있는 하느님입니다.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지각 없고 철없는 존재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이 세상에 온 이 하느님 같은 새 생명을 지키고 보살피고 기르는 데에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제까지 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인간의 시간, 그 가운데서도 추상화되고 등질화된 인공의 시간표에 따라 새 생명을 키우고 교육시킬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 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힘만으로 잃어버린 낙원 에덴 동산을 복원할 수 있으리라는 꿈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아직도 '유전 공학'이니 '게놈 프로젝트'니 하는 첨단 과학의 탈을 쓴 야바위놀음 형태로 우리의 의식을 가위누르고 있습니다.


스스로 제 앞가림을 못하는 생명체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다른 생명체들은 신의 특별한 은총이 없는 현실 공간에서 자연의 시간 속에 감추어진 죽음의 그림자와 맞서야 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두고 쌓아 온 경험을 신체적 기억으로 바꾸어 유전 정보로 코드화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능으로 전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태어나 따로 교육받지 않더라도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습니다. 제 삶의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는 힘이 생명체 안에 저절로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과보호 아래 사이버 공간에서 역사가 없는 참외를 사 먹으면서 한겨울에도 런닝과 팬티 바람으로 살아가는 현대판 철부지 아담과 이브는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덩달아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털 빠진 원숭이가 되어, 유전되지 않은 삶의 정보를 후천적으로 배워 익힐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졌습니다. 배워 익히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명체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자연의 시간'에서 나온 '인간의 시간'이 '문명의 시간' 속으로


제 삶의 시간을 스스로 통제할 힘이 없어서, 남이 사이에 들어 통제할 때, 이 시기를 우리는 유년기라고 부릅니다. 통제의 주체가 '부모'일 때, 그리고 '부모'의 삶이 '자연의 시간'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지속할 때, 통제의 결과는 자율성의 강화로 나타나며 인간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과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나 통제의 주체가 지배자이고, 이 지배자의 관심이 자연의 시간, 생명의 시간과는 동떨어진 인공의 시간 속에서 지배를 영속화하는 데에 있을 때, 통제의 결과는 타율성의 내면화로 나타나며, 인간의 시간은 노예적인 굴종이나 기계적인 자동 인형의 습관화된 반복 동작으로 귀결됩니다.

앞에서 저는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유전 정보의 형태로 물려주고 물려받는 신체적인 기억인 본능에 의존해서만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의 시간'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인간의 시간'을 따로 마련해서 살 길을 찾아 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시간'은 '문화의 시간'과 '문명의 시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예를 하나 들지요.


여기에 대장간이 있습니다. 대장간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드나듭니다. 호미, 괭이, 삽, 쇠스랑, 보습 따위를 벼리려고 오는 사람들이 한 부류이고, 칼, 창, 철퇴, 화살촉 따위를 벼리려고 오는 사람들이 또 한 부류입니다. 대장장이는 어떤 때는 호미나 낫을, 또 어떤 때는 칼이나 창을 만듭니다. 쇠붙이를 벼려서 쓸모있는 도구를 만든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맡기는 사람과 도구의 쓰임새는 아주 다릅니다. 앞사람들은 농사꾼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주문하는 농기구들은 자연과 교섭하는 데에 이를테면 밭을 갈고 김을 매고 풀이나 나무를 베는 데에 쓰입니다. 이 연장들은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매개하고 통일시키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문화의 산물입니다. 이와는 달리 칼과 창 따위를 주문하는 사람들은 싸움꾼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벼리게 하는 무기들은 인간과 교섭하는 데에, 이를테면 다른 사람을 위협하여 굴복시키거나, 그러려는 사람과 맞서거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죽여서 제 잇속을 차리려 들거나, 그러지 못하게 막으려는 데에 쓰입니다. 이 연장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문명의 산물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일터에서 똑같은 쇠붙이를 다루더라도 대장장이가 삽이나 보습을 벼리는 시간은 '문화의 시간'이고, 철퇴나 화살촉을 벼리는 시간은 '문명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사꾼이 괭이로 땅을 일구는 시간은 '문화의 시간'이고, 사람들이 싸움터에서 서로 맞서 칼과 창을 휘두르는 시간은 '문명의 시간'입니다.

이처럼 과학이나 기술, 또는 과학 기술은 문화에 봉사할 수도 있고, 문명의 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화는 대체로 사람이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고 다른 생명체와 이웃과 더불어 사는 힘을 키워 주는 자율의 영역을 넓혀 주는 구실을 하지만, 문명은 대체로 지배와 종속을 강화하고 타인과 다른 생명체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입니다.


자율성과 생명력을 박탈하는 교육의 덫


저는 기회가 닿는 대로 여러 차례 교육의 궁극 목표가 아이들에게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는 힘을 길러 줌과 아울러 더불어 사는 힘을 길러 주는 데에 있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제 삶의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생명체는 온전한 생명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제 앞기림할 힘을 온전히 지니고 태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서 그 힘을 길러 주어야 합니다. 더 쉬운 말로 하자면 씨 뿌리고 길쌈하고 집 짓는 일에서부터 건강을 지키는 일에 이르기까지 제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때까지 거들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사람 꼴이 질경이나 강아지풀만도 못하게 됩니다.

날마다 해 뜨는 시간 다르고 달 뜨는 시간 다릅니다. 달마다 그물에 걸리는 물고기 종류 다르고 밥상에 오르는 푸성귀와 들판에서 익어 가는 곡식 다릅니다. 철마다 입는 옷 바뀌고 사람이나 다른 동식물의 생태와 삶의 양식이 변합니다. 모든 시간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등질적인 실제 시간은 없습니다. 삶의 시간은 시계로 측정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도시 문명에 바탕을 둔 각급 제도권 교육의 시간표는 개별 생명체의 질적인 차이를 반영하는 살아 있는 시간, 사람마다 삶의 필요에 따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날마다 똑같은 시간에 달마다 똑같은 과정을 거쳐 해마다 똑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똑같이 앵무새처럼 머리 속에 강제 입력하기를 강요합니다. 자율성과 생명력을 박탈하는 이 노예화, 기계화 과정과 집단 교살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아이들을 이 무서운 덫에서 풀어 주어야 합니다.


삶의 단위가 점점 커진 데에는 공생의 뜻이 있습니다


교육의 궁극 목표 가운데 개체 생존 유지 능력의 배양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더불어 사는 힘을 길러 주는 것, 곧 공생 능력, 상생 능력의 함양입니다. 사람은 개별 생명체로 태어나지만 개미나 벌처럼 한데 모여 더불어 살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생명체입니다. 사람에게 사회는 '우리'라는 울타리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사회'라는 집단 생명체의 기능이 분화되어 나타나는 모습이 '개인'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긴 역사 과정을 통해서 가족에서 씨족으로, 씨족에서 부족으로, 부족에서 민족으로, 민족에서 인류로, 인류에서 생태계, 지구 생명체 전체로 공생의 범위를 넓혀 온 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삶의 단위가 이렇게 커진 데에는 자율보다도 통제가, 평화로운 결속과 연대보다는 총칼을 앞세운 억압과 강권이, 사랑보다는 증오가, 소박한 욕구보다는 탐욕이 더 큰 몫을 한 듯이 보입니다. 네 것 내 것 없이 함께 나누며 가난하지만 오손도손 살던 원시 공동체 사회 울타리가 허물어지고, 오로지 사람을 노예로 부리거나 팔아먹을 욕심에 눈이 멀어 걸핏하면 전쟁을 일으키던 고대 노예제 사회를 거쳐, 양반 자식들은 아무리 덜 떨어져도 억압과 착취의 자유까지 누리는 반면에 상놈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고개 들 자유마저도 박탈당하는 중세 봉건제 사회의 가혹한 신분 질서를 경험하고, 오늘에 이르러서도 탐욕에 눈이 멀어 돈만 된다면 땅이 죽는 것도 물이 썩고 공기가 더럽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비정한 자본주의 상품 경제의 족쇄에 묶여 소수의 유한 계급을 위해서 다수의 군중들이 임금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역사 과정을 일별하면 부정적인 생각은 더 강화됩니다. 그러나 현상보다는 본질이 더 중요합니다.


삶의 울타리가 넓어지고 작은 삶의 단위가 더 큰 삶의 단위로 통합되는 데에는 그만큼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배타성으로 드러나는 이기심의 가시 바늘에 찔리면서도 눈 질끈 감고 끌어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가족 이기주의, 소집단 이기주의, 민족애를 가장한 국가 이기주의, 세계주의로 치장한 인간 중심주의를 차례로 극복해 가야 합니다. 꿈 같은 생각이라고 코웃음칠 분도 있을 겁니다. 피비린내나는 계급 투쟁의 역사 과정을 떠올리면서 살이 떨리는 느낌에 사로잡힐 분도 있을 겁니다. 어떤 분들은 작은 나라 오붓한 모둠살이를 꿈꾸기도 하겠지요. 오붓하던 원시 공동체를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흉년이 들면 먹을 것이 없어 떠돌다가 서로 만나면 죽이거나 잡아먹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저 먹을 것도 없는데 이웃을 돌볼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전쟁 포로를 잡아 노예로 팔아먹었던 그리스나 로마의 장군들은 그 행위가 치가 떨리게 가증스럽기는 하지만 생산력이 그만큼 발전하여 노예가 저 먹을 것 이상을 생산하던 시대 상황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이 노예제를 무너뜨리는 데에는 스파르타쿠스 같은 해방 노예가 십자가에 매달리면서 보여 준 사랑이 있었습니다. 중세 신분 질서를 무너뜨리고 근세 시민 사회로 이행하는 데에도 살육의 도구인 총과 칼에 맞서 생산의 도구인 괭이와 낫을 휘둘렀던 전봉준 일행 같은 인간 해방의 불타는 사랑이 뒷받침되었습니다.


탐욕스러운 '문명의 시간'


이제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다양성이 결여된 단세포적이고 추상적이던 '온생명'이 분열하면서 다시 더 큰 하나로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생명의 시간, 자연의 시간이 전개됩니다.


생명의 기능이 죽음의 위협에 맞서 더 큰 하나를 지향하면서 모습을 바꾸어 가는 창조의 과정은 다양한 생명체들을 낳는데, 이 다양성의 확대가 진화의 참 모습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생명의 바다에서 어느 순간 사람 모습이 빚어졌습니다. 너무 굼떠서 다른 생명체처럼 재빠르게 과거 삶의 체험을 신체적 기억으로 전화시켜 유전 정보의 형태로 후손에게 물려주어 살 길을 찾게 하는 데에 실패한, 이 털 빠진 원숭이는 자연의 시간 곁에 인간의 시간을 따로 마련하여 후손들에게 생존 훈련을 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는 이 훈련 과정을 '스스로 살아남기', '더불어 살아남기'라고 부릅니다.


초기에 이 인간의 시간은, 자연을 큰 스승으로 삼고 마을 어른을 작은 스승으로 삼아 끊임없이 재생 가능한 생체 에너지를 써서 텃밭을 일구고 짐승을 기르고 화덕에 불을 피우고, 대장간에 가서 호미와 낫을 벼리고 일하다 힘들면 허리 펴고 흥얼거리다 술 한 잔 걸치면 어깨춤을 덩실거리던 '문화의 시간'으로 채워졌습니다. 그러나 생산력이 높아지고 남아도는 잉여 생산물이 나타나면서 몸으로 때우는 대신에 잔머리 굴리고, 더불어 살 길을 찾는 대신에 저 혼자 잘 살려는 탐욕스러운 한 줌의 무리들이 도시를 근거지로 삼아 창과 칼을 벼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배 계급의 지배욕과 탐욕이 '문화의 시간'을 '문명의 시간'으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중세 봉건제 농경 사회가 근세 자본제 산업 사회로 바뀌면서 이 변질은 가속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인간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 생명의 시간과 점점 더 동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가속화된 변질의 중심축에는 동력원의 변화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세 농경 사회까지 생산력을 발전시켜 온 주된 동력원은 사람과 길들인 짐승의 힘, 곧 인력과 축력이라는 생체 에너지였습니다. 이 동력원은 늘 재생될 수 있고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청정 에너지였고 자연 친화적인 에너지였지만 지배 계급의 탐욕을 채워 주는 데에는 비효율적이었습니다.


문명의 시간은 도시 공간 안에서 증기 기관을 만들어 내고, 내부 동력원인 생체 에너지 대신에 외부 동력원인 화석 에너지, 곧 석탄과 석유가, 세계 지도와 수천 년을 지속해 왔던 삶의 양식을 삽시간에 바꾸어 놓았습니다. 노예 소유주와 지주라는 지배 계급을 대신해서 자본가라는 새로운 지배 계급이 나타났습니다. 자본가 계급은 자연 친화적인 문화의 시간보다 기계 친화적인 문명의 시간을 더 선호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연을 이루는 생명체들은 모두 유기물들이어서 가공과 장기 보존에 한계가 있는데 이 새로운 지배 계급의 탐욕은 끝간 데를 몰라서 늘 새롭게 가공할 수 있고 수천 년 수만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무기물에 더 호감이 갔으니까요. 본디는 사이가 어정쩡하거나 소원했던 과학과 기술은 새로운 동력원을 매개로 찰떡궁합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과학 기술 문명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자본 계급은 산업 도시에 근대화한 공교육 기관을 서둘러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는 전인 교육을 내세웠지만 진짜 목적은 산업 사회에 맞춤한 기계 인간과 나사못을 짧은 시간 안에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기계는 잘 필요도 없고 쉴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어서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이 기계에 붙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니 아이 하나를 마을 전체가 지켜보면서 교육시킨다는 것은 어림반푼도 없는 낭비로 여겨졌습니다. 시간은 돈이었습니다. 시간을 아끼려면 밤낮의 구분도 없애야 하고 해뜨면 일어나고 해지면 자는 생활 습성도 뜯어 고쳐야 했습니다. 이 일을 전문으로 맡아서 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한 반에 몇십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몰아넣고도 통제할 수 있고, 자연의 시간에 아랑곳하지 않고도, 그리고 더불어 살 힘을 길러 주지 않고 산업 사회의 역군과 산업 예비군으로 바꿀 수 있는 초인이 교사라는 이름으로 훈련되고 양성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살 힘을 길러야 합니다


더불어 살 힘을 길러 준다는 교육의 궁극 목표는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힘을 길러 준다는 목표보다 더 불온하게 여겨졌습니다. 더불어 살 힘을 길러 주면 임금 노예인 주제에 상전인 자본가에게 같이 살자 하고, 자기들끼리 곧 동아리를 이루어 자본가에게 맞설 것입니다. 이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철저히 서열화하고 경쟁을 붙여서 갈기갈기 찢어지고 흩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통제에 순응하고 자율성을 잃게 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철없이 살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보다 환상을 심어 주는 것이 교육의 직접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생산력의 무한한 발전은 무한히 늘어나고 무한히 커지는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켜 줄 수 있다는 신화를 모두 믿게 하고, 빵만 키워 놓으면 누구나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야바위놀음을 그럴싸하게 여기도록 세뇌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늘 교과서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뒤로 수십 만 년 동안 땀흘려 일하면서 생명의 존엄성을 배우고, 노예로, 농노로, 임금 노동자로 전전하면서도 점점 더 커 가는 사랑의 힘으로 노예 상태에서, 신분의 질곡에서, 소외된 노동과 가당찮은 탐욕으로부터 벗어나 이제는 인류만 더불어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구 생명계를 이루는 모든 생명 공동체가 다 함께 같이 더불어 살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인류에게 미래가 없다는 자각에까지 이른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자본주의에도 자본 계급에게도 미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하트마 간디의 말대로 아직 이 지구에는 다른 생명체와 공존하고 상생하고자 하는 건강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생명 자원이 있지만, 이 자원은 자본가 한 사람의 탐욕을 충족시켜 주기에도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탐욕에 맞서서 우리 아이들을 지켜 내야 합니다. 이 아이들을 자연이 시간과 이어진 문화의 시간으로 안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삶과 사랑과 자유가 하나임을, 그리고 그 하나됨을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살 힘이 붙을 때 이루어질 수 있음을 깨우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 다짐과 더 큰 사랑으로 죽임의 세력에 맞서는 결의를 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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